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캉딩급 호위함 (문단 편집) == 클리어 스트림 스캔들 == 라파예트급을 도입하는 과정에는 비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1993년 12월에는 무기 획득실의 인칭펑(尹淸楓) 상교(한국군의 대령급)가 피살되어 [[이란현|이란]] 현 쑤아오 인근 해변에서 발견되었다. 인칭펑 상교는 라파예트급 도입에 대한 비리를 고발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던 중이었기에 의혹은 더욱 커졌다. 90년대 군 당국의 수사는 군내의 비호 세력과 외부의 압력으로 지지부진하였다. 2000년 [[천수이볜]]이 집권하면서 인칭펑 상교의 유족의 탄원을 받아들여 특별 수사팀이 발족하면서 구체적인 비리의 규모가 드러나게 된다. 도입가격 160억 중 무려 35억 프랑이 뇌물로 군에 제공되었고, 그중 11억 프랑은 정관계 인사들에게 흘러 들어갔다고 추측되었다. 이 수사를 통해 군 관계자 6명이 체포된다. 그러나 이후 증거 및 혐의를 찾아내지 못해 2010년에 6명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비리의 몸체는 밝혀내지 못했다. 한편 이 스캔들은 [[프랑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35억 프랑 중 프랑스 쪽으로 흘러 들어간 뇌물은 [[룩셈부르크]]에 있는 클리어 스트림 은행이 관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2001년 6월 22일 룩셈부르크의 반 림베크 예심판사 수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2004년 증거부족으로 [[불기소처분]] 되었다. 2004년 5월 3일 상황이 반전된다. 크리어 스트림 은행에서 라파예트 비리 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익명의 고발장이 전달된 것이다. 고장발에는 편지와 함께 CD가 동봉되었는데 관련자의 명단이 들어 있었고, 당시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7월부터 프랑스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숨겨진 계정을 발견하지 못함에 따라 10월 허위 제보로 결론을 내리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6년 사르코지가 소송을 내면서 다른 방향으로 튄다. [[DGSE]]의 수장이던 필린 론도 장군은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에 호출을 받는다. 도미니크 빌팽은 사건이 있었던 2004년에는 외무 장관이었며 2006년에는 총리로 재직하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빌팽은 론도 장군에게 이런 요구를 했다고 한다. 수사기관이 아닌 DGSE가 국제 테러리스트와 연관을 이유로 라파예트급의 비리에 대해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항은 [[니콜라 사르코지]]의 계좌 조사였다. 아후 익명의 고발장을 작성한 이도 밝혀졌는데 EADS의 부사장이던 장-루이 제르고랭이었다. 제르고랭은 빌팽 총리와 친한 사이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의혹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특히 2004년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와 빌팽 총리는 차기 대권을 두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사르코지는 빌팽이 정보기관을 움직여 허위로 목록을 작성하고 수사함으로 자신을 몰락시키려는 음모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이던 [[자크 시라크]]의 개입 의혹도 제기하였다. 사르코지와 빌팽은 언론을 통한 공방전을 펼쳤고 빌팽은 2009년 거짓 고발, 위조 문서 등 4개의 혐의로 기소 되어 공판이 진행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2010년 1월 28일 파리 형사법원에서 빌팽이 문서의 위조 사실을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 판결을 내린다. 2011년 9 월 14 일 항소심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고 프랑스 검찰이 승복함에 따라 사건은 종결되었다. 즉 라파예트급의 비리는 프랑스와 대만 양국에서 큰 문제로 불거졌으나, 양국 모두 구체적 정황을 잡아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친펑 해군 대령이 의문사 이후 충호 계획 때부터 쌓아온 군함 건조 계획들이 정지되었다. 건함 관련 기술진들도 사라져버리면서 연구개발 통합 및 프로젝트 관리를 수행할 동력이 소멸되었다고 추정된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640926|#]] 그 결과 2010년대에 이르러 대만은 90년대의 전력을 가지고 강력해진 중국 해군과 맞서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맡게 되었다. 낙후한 함정을 대체하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기술적 모험을 해야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만 감사원 조사에 따르면 라파예트급 사건은 규율을 심각하게 위반해서 대만군 전투력과 국가 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캉딩급 도입의 후폭풍은 이렇듯 현대 대만 해군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한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에 막타를 스스로 쳐 버렸다. 원래 캉딩급 도입 전에 울산급 호위함을 도입하기로 했던 이유 중 하나가 가까워지던 한중관계에 대한 견제였기 때문이다. 이 결과 한국과의 단교가 가속화된다. 당시 대만 외교부장은 남한에게서 울산급 호위함을 도입하는 게 꼬이는 걸 보고 크게 분노했고, 울산급 호위함 도입 계획이 만약 잘못되었다간 '''한국과의 외교가 불안정해질거라 생각하고 총통부로 갔다.''' 따라서 [[리덩후이]] 대만 총통은 1991년 8월 6일 군사회담에서 예창통에게 “한중의 전통적 우의는 깊으며 유지되어야 한다. 한국의 현대조선은 국가의 정치적, 이어 "현재 울산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어 조국의 선전을 도모하고 양국 우호에 해가 될 것"이라며 "해군이 이를 잘 처리해 서면 보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리덩후이가 이러한 지시를 했을때 이미 프랑스와 계약을 하고 최종 가격 협상을 한 상태였지만 이를 즉시 총통에게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서 매우 의심스러웠다. 이미 그 이전인 7월 29일 대만 해군 참모총장은 라파예트급의 '비밀 조달'을 승인하였다. 결국 라파예트급 사건을 본 리덩후이 '''대만 총통은 한국과의 외교 단절당한 뒤, '울산급 사건도 외교 단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고 말했다. [[http://www.southnews.com.tw/LiDe/LiDe0/00008.htm|#]] 이런 온갖 피해를 끼치며 도입한 캉딩급은 위 문단에 나온 대로 대잠능력이 우수한 걸 빼고는 특출난 것이 없으며 대공무장은 오히려 형편없는 수준인 평범한 호위함이었다. 고작 이런 함선을 얻자고 참으로 크나큰 대가를 치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